예수께서 광야에서 이루신 일

By | February 16, 2020
예수께서 광야에서 이루신 일 2//16/20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2-15

설교 Contents

도스토예프스키 의 까라마조프 형제들 – “대심문관” 중에서

‘네가 그자냐? 정말로 그 자인 것이냐?’ 하지만 대답을 들으려 고도 하지 않고 재빨리 덧붙이지. ‘대답하지 마. 입 다물고 있어.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더욱이 너는 네가 이전에 이미 말한 것에 아무것도 덧붙일 권리가 없어. 도대체 뭣하러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냐? 네가 우리를 방해하려왔다는 건 너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거다.

네가 세상에 있을 때 광야에 들어갔었지. ’무섭고도 영리한 정신이, 자기 파괴와 무無의 정신이‘ 라면서 노인은 말을 계속 해. ’위대한 정신이 광야에서 너와 얘기를 나눴고 성경에 전해지는 바를 따르면 그가 너를 ‘시험’한 것으로 되어있지‘ 정말 그랬던 거냐? 그가 네게 세 개의 물음을 통해 고한 것, 네가 거부했던 것, 성경에서 ’유혹‘이라 명명한 그것보다도 더 참된 말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저 강력하고 영리한 정신이 광야에서 그때 너에게 실제로 던졌던 그 물음들과 그 힘과 깊이에 있어 겨룰만한 것을 짜낼 수 있을까?  왜냐면 이 세 가지 물음 속에는 이후 인류의 역사가 모조리 하나의 전체 속에서 결합되고 예언되어 있으며 또 지상을 통틀어 인간 본성의 해결할 수 없는 모든 역사적 모순들을 집약해 놓은 세 가지 형상이 그 속에 나타나 있으니까 말이다.

자, 이제 네가 직접 누가 옳은지를 결정해 봐라.  인간, 그리고 인간 사회에게 있어 ’자유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자, 저 메마른 벌거숭이 광야의 이 돌들이 보이느냐? 이것들을 빵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인류가 은혜를 아는 온순한 양떼처럼 네 뒤를 따라 달려올 것이다. 비록 네가 손을 걷어 갈까봐, 더 이상 그들에게 빵을 주지 않을까봐 영원히 두려움에 떨겠지만…… 하지만 너는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제안을 거부했는데, 복종이 빵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도대체 무슨 자유인가? 하고 생각했던 거지. 너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알고 있느냐? 바로 이 지상의 빵의 이름으로 지상의 정신이 너한테 반기를 들고 일어나서 너와 싸워 너를 이길 것이며 ’일단 먹여 살려라. 그런 다음에 그들로부터 선행을 요구하라!‘ 바로 이런 말이 쓰인 깃발을 들고 너에게 대항하여 너의 사원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그들이 여전히 자유로운 채로 남아있는 한, 어떤 학문도 그들에게 빵을 주지 못할 것이니 그들은 결국에 가선 자신들의 자유를 우리의 발아래로 갖다 바치면서 우리에게 ’차라리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먹여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자유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넘쳐날 만큼의 지상의 빵이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네들끼리 그것을 분배할 능력이 없는 족속이니까!  또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도 확신하게 될 터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나약하고 악덕하고 하찮은 반역자들일 뿐이니까. 너는 그들에게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만 다시금 반복하건대, 그것이 약하고 배은망덕한 인간종족의 눈에 과연 지상의 빵에 비길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천상의 빵의 이름으로 수천 수만 명의 인간들이 너를 따른다 해도,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멸시할 힘이 없는 수 백 만명, 수 억 명의 인간들은 어떻게 될까? 너에게는 고작해야 수만 명에 불과한 위대한고 강한 자들이 더 소중하고 나머지 수 백 만 명-약하지만 너를 사랑하는, 바다의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인간들은 그저 위대하고 강한 사람들을 위한 재료가 되어야 한단 말이냐?

천만에, 우리에게는 약한 자들도 소중해. 그들은 악덕으로 똘똘 뭉친 반역자들이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들이야 말로 고분고분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선두에 서서 그들의 자유를 대신 견뎌줌으로써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경외심을 가질 것이며 우리를 신으로 간주할 것이니-그리하여 그들에게 있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에게 복종하고 있으며 너의 이름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노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그들을 다시 기만하게 될 것인데 네가 우리에게 오는 걸 더 이상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 거든, 바로 이 기만 속에 우리의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니,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해설

1. 대심문관은 1,500년전 예수가 사막에서 추기경의 표현으로 무섭고도 지혜로운 악마, 자멸과 허무의 악마 혹은 강하고 현명한 악마 성경에서 사탄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내민 세 가지 제안을 거부함으로 인류가 곤경에 처했다고 비난한다. 예수가 거부하였던 것은 기적을 통해 만든 지상의 빵(육체의 양식), 기적이라는 신비, 그리고  카이사르의 칼로 상징되는 권위 그 세 가지이다.

신약성서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이 세 가지를 두고 인간과 신, 혹은 인간과 악령이 벌이는 갈등을 대심문관은 ‘전 세계와 인류의 미래사를 남김없이 망라網羅해서 표현한 그 세 가지 말, 또는 세 가지 물음 속에, 인간의 전 미래사未來史가 하나로 통합되어 예언豫言되어 있을뿐더러 지구 전체에 미치는 인간 본질의 해결할 수 없는 역사歷史의 모순矛盾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세 가지 이미지’라고 했다.

2. 신神은 인간에게, 이 세 가지가 가져다주는 지상의 현실 생활의 안락安樂함, 일시적인 안전감安全感, 충성심忠誠心의 만족滿足들에 굴복하지 않고, 비록 그러한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러한 선물膳物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자유로운 신뢰와 사랑을 말한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말은 그러한 선물의 유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神은 자신을 택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을 대심문관은 자유로운 선택, 혹은 자유의지 혹은 줄여서 ‘자유自由’라고 불렀다.

그런데 대심문관의 항변에 따르면, 인간이란 너무나 무력하고 악한 반역자이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눈에 보이는 빵-을 쉽게 내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기적(신비)을 부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있지 않다. 인간은 신 자체보다 기적을 원하는 존재이지 않느냐 라고 반문한다. 그런데 너 예수는 기적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신앙을 갈망했기에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지도 않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했을 때도 그런 기적의 강한 힘에 지배받지 않는, 노예 같은 삶에서 오는 기쁨이 아닌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원했던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인간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고 비난한다. 예수는 인간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지나친 자유를 주었고, 결국은 그것이 인간을 혼란과 고통에 빠트리고, 결과적으로는 ‘인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대심문관은 계속해서 예수에게 말한다.

3. 너는 인간의 자유를 지배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너는 그 ‘자유를 증진시켜 괴로움을’ 심어주고 그 괴로움을 통해 인간의 마음의 왕국에 영원한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던 거다. 너는 너에게 매혹된 인간이 자유의지로써 너를 따라올 수 있도록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랐다. 그 결과 인간의 확고한 고대율법을 물리치고 그 후부터, 무엇이 선이고 어떤 게 악인지,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거다. 게다가 지도자로는 그들 앞에 너의 모습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나 너는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진 않았느냐? 만일 선택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이 인간을 압박할 때 인간들이 네게 등을 돌리고 너의 모습도, 너의 진리도 배척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4. 이 지상에는 세 가지 힘이 있다. 즉 이들 무력한 폭도들 대부분의 인류 의 양심을,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들을 영원히 정복하고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은 이 지상에 세 가지 밖에 없단 말이다. 그 세 가지 힘이란 바로 기적奇蹟과 신비神祕(파워)와 권위權威를 말하는 거다. 너는 이 세 가지를 인간에게 행사하기를 거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자신을 따르기를 기대하여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 무섭고도 지혜로운 악마가 너를 성전꼭대기에 세워두고 이렇게 물었지. ‘만약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를 알고 싶으면 여기서 뛰어내려봐라. 왜냐하면 아래로 떨어져 몸이 부숴지지 않도록 천사가 받아 준다고 책에 씌어있으니까. 그때 너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를 알게 될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증명되지 않느냐?’

5. 인간의 본성이 기적을 부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을까? 특히 생사가 갈린 그런 무서운 순간에, 가장 무섭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괴로운 정신적 의혹에 자유로운 양심만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인간이 창조되었을까?….너는 모든 인간이 너를 본받아 기적을 구하지 않고 그냥 믿음으로 신과 함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거야. 그러나 기적을 부정할 때 인간은 신까지도 함께 부정한다는 것을 너는 몰랐던 거야. 왜냐하면 인간은 오히려 신보다 기적을 구하기 때문이지….너는 인간을 기적의 노예로 삼지 않고 기적의 구속을 받지 않는 기적이 있든 없든 무관하게 신을 따르는 자유로운 신앙을 기대했던 거야.‘

6. 네가 원했던 것은 강력한 힘에 지배를 받는 인간의 노예 같은 삶에서 오는 제한적, 피상적 기쁨이 아니고 자유로운 인간이었어. 하지만 이런 점에서 너는 인간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 했던 거야……물론 너는 자유의 아들, 신께 자유로운 사랑을 드리는 사람, 너 자신을 위해 스스로 원해서 성스러운 희생을 한 아들들을 자랑스럽게 가리키고 싶겠지? 하지만 그들은 몇 천 명, 아니 고작 몇 만 명 밖에 되지 않는, 거의 신과 마찬가지인 소수의 인간들일 뿐이야. 그렇다면 나머지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자유라는 무서운 선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해서, 그걸 감당 못하는 연약한 영혼들을 비난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7. 대심문관이 대변한 악마의 항변은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는 옳게 들릴 수 있다. 참으로 그렇다. 기독교의 신이 원하는 인간의 신앙은 인간의 힘으로는 시작하기도 유지하기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작고한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요 사상가인 레슬리 뉴비긴 Lesslie Newbigin은 말했다.

‘예수가 제시한 천국은 매우 초라하고 애매해 보인 것이었다. 실로 천국이 감추어진 것은 열방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엄청난 위엄威嚴 가운데 밝히 드러나 보인다면 ’자유로운‘ 신앙 안에서 기꺼이 예수를 영접할 여지餘地가 있겠는가? 당연히 누구나가 다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광榮光이 성육신成肉身의 ’낮아짐‘ 속에 가리워졌을 때만, 자유로운 회개悔改와 신앙信仰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Gospel in the Pluralistic Society. Lesslie Newbigin

8. 기적’과 ‘신비’와 ‘힘’과 같은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상에 초라하게 나타난 신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사랑이다. 그런 반대급부의 유무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인간, 거의 신과 다름없는 자들일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악마가 인류에게 제시해왔던, 그래서 나름 성공했던 대안代案alternatives을 늘어놓는다.

9. 그래서 우리는, 너의 위업을 ‘수정’修正해서 인간을, 기적과 신비와 권위위에 세워왔지. 사람들은 자신들을 양 떼처럼 끌어주고, 큰 고통을 준 자유라는 선물을 없애주고 눈에 보이는 양식을 보장保障하는 자가 나타난 것에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우리는 인간이 무력하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사랑으로’ 인간의 짐을 덜어주고 연약한 본성을 이해하고, 우리의 허락을 얻으면 그들의 죄까지도 용서 받을 수 있도록 했는데 어찌 우리가 인류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중세까지 로마 카톨릭은 신자의 자유를 반납받고 대신 기적과 신비와 권위라는 선물을 주어왔다. ‘그런데 너는 왜 우리를 방해하려고 지금 나타났느냐? 화를 내려면 내라. 왜냐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우리는 너와 손을 잡은 게 아니라 악마의 손을 잡았어! 이게 바로 우리의 ‘비밀’이야.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너를 버리고 그와 함께 했지. 8세기 전부터 그랬으니까. 예전에 네가 거세게 거절했던 이 지상의 왕국을 그 ‘악마’에게서 받은 지 8세기나 되었어. 우리는 악마에게 로마 황제의 칼을 받고, 우리가 이 지상의 유일한 왕이라고 선전했어…그들은 우리에게서 빵을 받고,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으로 믿고, ‘진정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기뻐 날뛰었어!!

10. 대심문관은 말을 끝내고 ‘죄수’예수의 대답을 기다렸어. 죄수는 가만히 추기경의 눈을 들여다보며 반박도 하지 않고 그냥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었어. 추기경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말이라도 상관없으니 어떤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지. 하지만 죄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다가와 아흔 살이 된 노인의 핏기 없는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어. 그게 대답이었어. 노인의 몸은 떨리고 입술 근처에 경련이 일어났어. 추기경은 철문을 열고 말했어. ‘자 이제 나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그래서 도시의 캄캄한 광장으로 풀려난 죄수 예수는 그곳을 조용히 떠났어. 노인의 가슴속에는 입맞춤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는 계속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어.‘

11. 대심문관 추기경이 대언代言한 이 신에 대한 항의와 비난은, 도스토예프스키를 평생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이슈이다. 대심문관은 즉 이반이며, 또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무신론과 윤리적 합리주의, 유물론적 사회주의라는 선善의 얼굴을 쓴 악惡 로마 카톨릭에 의해 이미 선보였던 악惡의 힘과, 추상적으로 여겨지는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과의 대결을 이렇게 절묘하게 기술한 문서는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예수는 자유의지를 감당할 수 있는 선택된 자의 신이라면, 대심문관은 나약한 영혼을 가진 대다수의 인류의 편에 서서 그들의 짐을 대신 져주고, 선악을 구별해 주며, 삶의 자원을 책임지겠다고 자임自任한 자다. 대심문관이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인류에 대한 진정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지극하기에, 그는 인류를 ‘속여서라도’, 그들에게 잠시간의 행복을 주고, 그들의 자유의 짐을 대신 지고 가며 사실은 그들의 자유를 빼앗고 그들의 삶을 책임지마고 선전한다.

12. 대심문관이 제시한 ‘미래의 왕국’은 역사 속에서 무신론, 유물론적 사회주의로 구체화될 것임을 작가는 예언하고 있다. 그것은 악마가 제시한 지상의 빵과 기적과 같은 신비, 그리고 카이사르의 칼을 받아 들여 값싼 일시적인 가짜 행복과 인간의 자유를 맞바꾸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심문관 자신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며 ‘인류를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지고 있다’고 자처한다. 무신론적 사회주의가 그러하다! 이것이 이반의 신앙이며 주장이다. 그는 계속한다. ‘신은 있을까? 불멸이란 것도 있는 것일까?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회주의와 같은 새로운 체제로 인류를 개조하고자 하는데, 죄다 거기서 거기라고 봐.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다른 끝에서 시작된 같은 문제라는 거지.’ 볼세비키 혁명이 있기 무려 40여년전에 무신론적 사회주의의 발생을 예견한 작가의 통찰은 무서울 정도다. 신과 불멸의 이야기와 무신론적 사회주의는 다른 끝에서 시작된 같은 문제라는 이반의 신념이 여기에 배어 있다. 이것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 유형 전의 자신과 유형 기간 동안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된 체험을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다.

13. 그러면 도대체 대심문관 즉 이반의 인류애의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여기에 대해 이반의 말에 귀를 기울여온 알료샤의 반론처럼 ‘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善의 탈을 쓴 악惡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의 선과 외형적으로 매우 유사한 가짜, 무서운 모방성이다. 이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악은 추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성서도 악마는 빛나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고 말한다. (고후 11:4) ‘사랑이란 이름으로 인류를 노예화奴隸化’한 것이 대심문관 서사시에 나타난, 인류가 겪고 있는 혼란과 혼돈이다.

작가는 사회주의적 신념에 가득 차 있던, 유형 전의 사상과 그 이후를 경험하면서, 사회주의가 말하는 사랑과 신의 사랑은 비슷해 보이지만, 진실이 아니며, 결국은 도덕적道德的, 사상적 질병思想的疾病과 같은 것으로, 인간을 파멸破滅하게 되리라는 것은 믿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정신과 신의 능력으로 이러한 가짜 사랑의 유혹을 이겨내고 혁명의 길로 치닫고 있는 러시아를 구해 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14. 무신론적 사회주의는 기독교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며, 그들에게 안식과 생활의 양식을 주지 못한다고 항상 비난한다. 그래서 무신론적 사회주의는 극소수의 사람만 감당할 수 있는 자유와 천상의 빵을 폄훼貶毁하고, 수억만의 사람들이 추종하는 지상이 빵의 종교를 선전한다. 인종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모든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그 사상을 신봉하고 따르는 댓가로서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보이지 않는 신과 현실에서 신비와 권세를 보여주지 않는 그 신을, 아무런 반대급부反對給付 없이 오직 자유로운 사랑으로 따른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대심문관의 예측과는 달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을 좇았으며, 지금도 좇고 있다. 무신론적 사회주의는 인민의 자유를 반납 받고, 다시 말해서 그들의 자유를 빼앗고 강제적이고 물질적인 조직화를 통해 인간의 자기실현과 구원그들의 개념상을 기대한다.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양식과 평등과 평화의 이름으로 역사적인 인간 삶의 모순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속칭 사회적 약자들에게 매력적인 가설이 될 수 있다.

15.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 한 세기동안, 대심문관이 예언했던 나라들은 하나같이 무너져 내렸다. 무신론적 사회주의는 그들의 리더들의 소망적 사고所望的思考wishful thinkning 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인류의 절대적인 문제-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공상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공상 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실험을 위해, 한 세기에 걸쳐 약 일억億명 내외의 인명이 살상되었고, 그 이상 수의 사람들이 고문과 유배, 투옥과 같은 비인간적인 인권유린으로 삶이 파멸되었다.

16.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유와 영혼이, 빵과 기적과 권세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심문관은 인간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 인류를 사랑하기에 모든 고난을 견디며 그들의 자유를 반납 받아 짊어지고, 세 가지 유혹을 모두 받아들인다. 대심문관의 이러한 정신, 그것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자. 적그리스도는 역사상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고, 20세기에는 무신론적 사회주의로, 그리고 21세기에도 그의 아류亞流나 변형된 형태變形形態로 나타나고 있으며, 아마도 세상이 지속되는 한은 어떠한 형태로든 포기하지 않고 세상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17. 사실상 대심문관의 시대 훨씬 전부터, 신의 진리는 이 세상의 힘에 의해 멸시를 당하고 채찍에 맞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형태로 나타났다. 신은 인간의 자유를 제어하여 힘으로 그들에게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초라하고 무력하게,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신인神人을 따를 자유와, 따르지 않을 자유를, 동시에 부여한다. 그런데 대심문관의 예측과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자유롭게 따랐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신의 사랑의 힘이 그들의 영혼에 진정한 자유의 힘을 준 까닭이다. 신의 은총은 대심문관이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무력한 인간이, 그 무거운 자유의 짐을 지려했고, 또 지고 가고 있다.

18. 무신론적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평등平等이다. 그리고 평등은 전체주의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평등하게 태어나고 그것은 신의 섭리에 속한다. 한 사회가 평등을 강하게 지향할 때 전체주의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다. 평등한 수입과 평등한 지위와 평등한 만족을 갈망하는 사회는 ‘반드시’ 다수에 대한 소수의 폭군적 통치와 더 큰 불평등을 가져온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점을 내다보았다. 그는 로마 카톨릭 보다 사회주의를 더 염려하였다.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40년도 더 전에 피바다를 이룰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했던 그는 분명 예언자다. 대심문관도 사회주의자들도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외친다. 그러나 그들은 신의 가면을 쓴 악의 세력이다. 그들의 연민과 사랑은 거짓이며 위선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사상이 지배력을 갖는데 착념하고 있으며, 그것은 거대한 자기의自己義Self-Righteousness 의 자기실현의 시도에 불과하다.

19. 자기 의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사악한 범죄라는 사실을 우리는 배워가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그럴 듯 하고, 버젓하고 선해 보이기 때문에 속기 쉽다. 그러나 그만큼 악마적인 것도 없으며 신이 가장 혐오嫌惡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식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그래서 매 시대마다 지식인들, 엘리트 들, 남달리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대심문관의 유혹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 1960-70년대에 지구상 인구의 거의 40% 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심문관은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아직 무르익지 않았던 사회주의의 소용돌이를 내다보고 그것의 허구성虛構性을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어떤 사상 때문이었을까? 그 답은 독자들 각자가 낼 일이다.

이 땅의 무신론적 사회주의자, 주사파 등과 같은 왜곡된 이념론자들에게

19. 나는 인간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선과 악을 판별하여 ‘나는 정의의 편에 있고 너는 악하며 파멸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는 한,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인류애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믿는다. 자본가資本家는 악惡이며, 빈자貧者는 선善하고 정의正義로운 자이기에, 악을 척결剔抉하기 위해 마르크스 주의와 그 아들들에 의해 지난 한 세기동안 저질러진 살육은 9,000만에서 1억 5천만 내외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바 있다.

대심문관이 뜨거운 ‘인류애’에 추동推動되어 ‘강하고 지혜로운’ 악마와 손을 잡고 지상의 빵과 기적, 그리고 힘을 골고루 나누어 주겠다고 인류를 기만해 온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진정 인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라도 던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심층부에는 ‘적어도 자신은’ 개미떼에 가까운, 빵과 권위에의 예속을 자원하는 무지한 대중이 아니라 ‘선택받은 초인超人과 같은 존재’라는 오만傲慢과 타인에 대한 은밀한 경멸輕蔑이 숨어있다.

20. 이렇게 인간집단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전체주의, 사회주의는 그 출발에서부터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말했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관통하여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탈린의 과오를 지적할 때 마다 반드시 ‘그스탈린가, 그리고 당신과 내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저질렀다’ 라고 말한다. [ The Gulag Archipelago, 수용소군도, 1973, 알렉산도르 솔제니친이 굴락 수용소에서 저술]

21. 그래서 조시마 장로의 고별설교에서 말한바 ‘모든 인간은 모든 사람들 앞에,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이 대해 죄인이며, 전 인류적인 죄, 세계적인 죄, 개개인의 개인적인 죄 등, 모든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고, 바로 이 사실을 자각했을 때에만, 비로소 인류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영원한 진리다.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악을 척결함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며 악한 자들임을 인정하고, 그 죄의 연대連帶 속에 겸허謙虛히 자신을 거치据置 시킬 때에야 비로소 인류의 하나 됨이 시작될 것이다.

현대 대심문관들의 위선

22. 러시아 혁명의 대부 레닌에 대해  사학자 폴 존슨이 말한다. ‘혁명을 추구한 레닌의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성인의 사랑과 비슷한 격정적인 박애주의博愛主義 였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에게서는 정치적 야심의 흔한 결점도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는 허영심도, 자의식의 과잉도, 권력행사에 대한 탐미도 없었다. 하지만 레닌의 박애주의는 매우 추상적인 열정이었다. 그의 박애주의는 인류 전체를 끌어안고 있었지만, 정작 레닌 자신은 실존하는 인간에게 사랑을 나타낸 적이 거의 없었고 관심조차 없었다.’ 모던 타임즈. 폴 존스/

가난한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천명하려 ‘자본론資本論’을 집필했던 카를 마르크스도, 딸아이가 영양실조로 죽을 정도로 가난했던 세월들이 있었지만, 부유한 친구 엥겔스를 만난 후에는, 그가 평생 후히 보내주는 연금 같은 돈으로 사실상 부르조아적인 생활을 했다. 그는 노동자를 개인적으로 한 번도 만나본적이 없으며, 낭비벽이 있고 고급포도주를 골라 즐겼으며, 하녀를 범해서 낳은 사생아에게 평생 단 한 푼의 생활비도 주지 않았고 하녀에게 단 한 푼의 급료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인류를 사랑했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 피붙이는 사랑하지 않았다. 자유의 적들, 전원책/ 대한민국의 대심문관들의 위선은 근래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바 있지 않은가? 얼마나 가증하며 역겨운가?

결론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받은 시험은 모든 인류가 통과해야하는 시험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그 시험에서 승리한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다. 우리는 가시적인 안전과 행복의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수님만을 따르기로 한 자들이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 그러나 지상생애에서 겪는 실존적 상황에서는 자주 넘어지며 실패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광야시험의 승리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큼 중요한 신앙의 과제임을 깨닫는다면 더 많은 정성과 열정을 쏟아 현세의 삶에서 주님만을 사랑하고 따르기를 결단해야 하지 않겠는가?

..편집자로부터 —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 형제들이나 그의 작품을 대한 적이 없으시면 더 어렵게 느겨질 수 있어서 배경을 먼저 이해하고 위의 내용들을 여러 번 다시 읽으신 후시간을 내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솔제니친의 본명은 알렉산드르 이자에비치 솔제니친 Aleksandr Isaevich Solzhenitsyn 입니다. 러시아의 저항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