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서

By | April 8, 2021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셰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석하게 하던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불리우던 한 사람이 입원했습니다. 요독증과 폐수종을 앓았던 그는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에게 고함을 지르고 병문안 온 사람들에게도 소리를 지르며 발악을 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름에 전혀 걸맞지 않은 동물같은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묻지를 못했습니다. 아내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남편에게 그의 병명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도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가련한 여인과 최고의 지성인!

이 사람은 인간존재와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논문을 쓰고, 수필을 쓰고 또한 주옥같은 글을 남기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충격과 아울러 감명을 주었던 실존주의 철학자 싸르뜨르 (Jean Paul Sartre, 1905~1980)였으며, 그의 부인(실제로는 계약결혼으로 법적인 부부가 아닌 동거인)은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monne de Beauvoir 1904~1986)입니다. 실제로 1929년 치러진 프랑스 철학교수 임용시험에서 싸르뜨르가 1등를 하였고 보부아르는 2등을 한, 글자 그대로 최고의 지성인 커플이었습니다. 1980년 4월 15일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싸르뜨르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에 프랑스의 학자들과 신문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인간의 주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존주의에 대하여 담담히 담론을 펼쳤던 대 철학자요 최고의 지성인 싸르뜨르가 왜 이렇게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야 했는가? 인간 자신이 가장 중요한 주체이며, 따라서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실존주의자인 그의 마지막이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의 마지막 순간이 그가 논문을 쓰고 강연하고 주장하던 인간실존의 자유와는 전혀 결이 다른 상당한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몹시도 당황하였습니다. 과연 그가 그토록 주장하던 인간실존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회의론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한 무명의 독자가 싸르뜨르의 비참한 죽음에 대하여 쓴 글을 신문사의 독자투고란에 올렸습니다. 신문의 독자투고란에 실린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싸르뜨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싸르뜨르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범하고 이름도 없는 독자는 정확하게 싸르뜨르의 비참한 죽음을 짚어내었습니다. 한 지방 신문 기사에는 그의 모습을, “심판의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실이 싸르뜨르를 공포로 몰아넣어 그로 죽음을 그토록 거부하게 했다.”라고 썼습니다.

반면에 싸르뜨르의 죽음과 180도 다른 죽음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1940년대에 미국 연방 상원의 채플린이었고 워싱턴 D.C.에 있는 뉴욕 스트리트 장로교회의 담임이었던 피터 마샬 목사님은 세상을 떠날 때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그의 아내 캐더린은 남편 피터 목사가 갑작스런 병으로 죽은 후 남편의 길지 않았던 이 땅에서의 삶을 전기로 펴냈습니다. “A Man Called Peter(피터라고 불리운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전기를 펴냈습니다. 이 책은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졌으며 오스카 영화상의 각본상 후보로도 선정되었습니다. 피터라고 불리우던 사나이 마샬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내 캐더린을 기다리는 마음을 간직하고 먼저 본향으로 평안하게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대해서 관심들이 많습니다. 이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씩 그 길을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들의 경험담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영혼이 갈 곳은 어두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두울 명(冥)자를 사용하여 지옥을 명부(冥府)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유족을 위로를 한답시고 “명복(冥福)을 빕니다” 라고 조문을 합니다. 그 말의 뜻은, 어두운지옥에서라도 복을 받으라는 아이러니칼한 言辭임과 동시에 얼토당토 않은 말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 죽은 혼령이 갈 곳이 없어서 구천(九天)을 떠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구천은 끝도 없는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의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죽어서 어두운 곳에도 가지않고 끝없는 구천을 떠돌지도 않습니다. 가야할 곳, 즉 本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두운 땅속인 地獄에도 가지 않습니다. 해보다 더 밝은 하늘나라인 天國으로 갑니다. 천자문에 첫 장에 나오는 ‘하늘 天’과 ‘따 地’는 극과극 입니다. 떠나온 곳 本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정녕 幸福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향을 향하여 떠날 때 웃으면서 갑니다. 편안하게 갑니다. 돌아갈 본향이 없는 싸르뜨르는 짐승처럼 울부짖다 지옥으로 갔지만, 돌아갈 본향을 분명히 알고있던 피터라고 불리우던 사나이 월터 목사는 평안하게 웃으면서 다시 만날 기약을 하고는 천국으로 갔습니다.

이 짧은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시여!
여러분들은 돌아갈 본향이 있으십니까?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지금 결단해야 할 시점에 서있습니다.
Which way do you want to take?
Now, you have to make a decision.
Not tomorrow, NOW, RIGHT NOW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6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