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감각을 회복하라 01

By | July 26, 2020

인간은 본성적으로 은혜에 수용적이지 못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것인데 반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려는 독립성과 자존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 은혜를 받아 들여 감사와 감격가운데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얼마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자신의 본성의 탄성이 되살아나고 은혜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자주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시지만 자주 우리의 완악한 본성은 그것에 저항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은혜의 감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흥의 길이요 회복의 길이요 영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민 17:1-13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 중에서 각 종족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 취하되 곧 그들의 종족대로 그 모든 족장에게서 지팡이 열 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되 3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 이는 그들의 종족의 각 두령이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임이니라 4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5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6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매 그 족장들이 각기 종족대로 지팡이 하나씩 그에게 주었으니 그 지팡이 합이 열 둘이라 그 중에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더라7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8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9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취하여 내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취하였더라 1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11모세가 곧 그 같이 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12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13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

은혜를 싫어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 민수기 17장은 은혜를 싫어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의 지도권에 대해 반역하였을때 하나님께서 땅을 열어 그들을 삼켜 버렸고 성막에서 불이 나와서 반역자들을 살라 죽여버렸습니다. 그래도 계속 반역하였을때 전염병이 창궐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후에 여호와께서 열두지파의 족장들에게 각기 자기 이름을 쓴 지팡이를 갖고 나오게 합니다. 지팡이는 통치권의 상징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통치를 위해 세운 대리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 밤사이에 레위 지파의 대표, 아론의 지팡이에서 움이 나고 순이 돋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열렸다고 했습니다. 히나님은 그 지팡이를 가져다 성막의 법궤 앞에 두게 하심으로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해 불평하는 자들의 입을 막고 순종을 촉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레위 지파를 택하신 것이 레위지파의 장점이나 탁월함 때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열두아들에게 유언기도를 할때 레위는 세겜 사건(창세기 34)때 보여진 레위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살인을 인해 가장 혹독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 속에는 ‘레위를 이스라엘 중에 흩으리로다’(창 49:7)라는 구절이 있는 데 이것은 향후에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서 기업을 받지 못하고 여러 지파 속에 섞여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흩어진 그들을 하나님은 자기 곁으로 모아 자기의 그늘 아래서 자신의 성막을 섬기며 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지파를 볼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을 깨달아야 했으며 하나님은 그렇게 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분임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싹이 나고 꽃이 핀 것은 생명력을 상징하는데 그것은 오직 은혜로부터 생렴의 힘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은혜속에 하나님의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패역한 자에게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10) 하신 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은혜란 일방적인 것이요 하나님이 자격없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이유없이 후히 베푸시는 호혜를 말합니다. 여기에 무슨 불평과 원망이 있을수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그것을 모릅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죽게 되었습니다..망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죽습니까? 허락없이 성막에 가까이 가려하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누가 나가라고 했습니까? 레위인을 볼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아 그래 하나님 은혜 감사하지. 수고 많다. 우리 대신 뽑혀서 참 수고 많이 한다’고 순종하고 따르면 되는데 그렇게 안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나가서 설쳐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어,,이러다가 다 죽겠는데요..’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너보고 나오라고 했느냐?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보여 주려고 레위인을 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낫다고 하는 사람,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의 본성으로는 은혜를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증상들-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우리는 은혜의 감각을 많이 잃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신앙의 생명력이 약해지고 매마르며 강퍅해 지고 맙니다. 은혜의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것이 은혜의 증상인가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의롭다 함이지요. 롬 5:21에도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선다라고 하면 어렴풋이 감은 잡히는데 꼭찝어서 말해보라고 하면 막연하기 일수입니다. 그러면 의로운 관계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랜 교회 생활을 하고서도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은혜를 누리고 있지 못함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먼저 우리를 사죄의 은혜의 방으로 초대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죄의 크기와 질을 묻지 않으며 우리의 못남과 부족함과 추함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따뜻한 열기가 우리의 자기의의 외투를 벗게 하고 자신을 훌륭한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 가리고 있던 내면의 자기방어의 커텐을 열게 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용서와 용납이 전제된 것이기에 은혜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고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가장 첫 단계가 바로 나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구원자시고 우리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를 건너뛰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식없이 인정할수있다면 여러분은 은혜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죄인됨이 도무지 인식이 안된다면 어떻게 할까요? 은혜의 성령을 구하십시오. 성령은 우리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알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의 참빛 아래 놓이면 반드시 자신의 죄를 보게 됩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키 위해 은혜의 성령을 구하는 기도는 늘 응답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  

둘째 은혜를 누리면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자각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대해 모호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은혜를 잃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 패역하였던, 사단의 하수인노릇을 하였던,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그분의 자녀, 백성, 왕이신 하나님의 왕자요 공주로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 은혜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누려야 합니다. 나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있으며 나의 가치는 내가 가진 조건이나 나의 성취나 타인의 평가와 관계없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날 위해 가장 귀한 생명을 쏟아 부으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무한히 높아져 있다는 진리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누리면 자랑스럽고 당당하고 꿀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평가와 인정을 받기 위해 전전긍긍하거나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 성취에 연연해 하지 않게 됩니다. 은혜의 이런 측면을 못누리고 있는 분들은 이 말씀을 받아 들이고 은혜의 성령께 이 진리가 내재화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느낌을 구하지 말고 진리대로 사십시오. 그게 순종입니다.

세번째 겸손하게 됩니다. 진실로 겸손은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겸손은 자신의 장점을 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은혜란 우리의 조건과 장단점에 무관하게 부어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겸손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 반대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주장이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고자하는 태도입니다. 벧전 4: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니라.’하나님이 대적하시겠다고 선포한 죄! 그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실상 은혜를 거부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은혜가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자신이 다 알아서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실제에서 사실은 하나님 없이도 잘 꾸려나가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하십니까?

민수기에서 보셨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신 것은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신 성막제사와 예배의 지도력에 대해 도전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하나님의 방법없이-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징계를 받고서도 ‘우리가 다 죽게 생겼습니다..’라고 징징대는 것을 보십시오. 

은혜 안에서 겸손한 사람들은 도무지 자신이 무엇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무수한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모세나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에스겔이나 바울이나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몸을 떨었고 자신의 부적합함을 아뢰었지 않습니까? 교회 공동체 에서도 이런 겸손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게으러서 교회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 일의 고귀함은 알지만 자신의 부적합함을 통감하기에 마냥 사양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중의 하나는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학생들의 학업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어리고 성장의 여지가 많다고 지적하면 매우 화를 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우스꽝스런 것이고 적다고 화를 내는것도 악한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날 교회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은 많지만 겸손한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이것은 영성의 적신호입니다. 은혜를 묵상하십시오. 은혜의 본질을 깨닫고 낮아 지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근본적인 자각이 여러분 마음에 자리 잡을 때까지 기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