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예배 2

By | July 19, 2020

** 일상 속의 예배 – 소주제 강의로 읽는 설교입니다.

이원론의 폐해
헬라철학의 이원론(dualism)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은 초대교회와 서구문화 속에서 자란 기독교는 성과 속을 분리시켜서 이해해 왔습니다. 교회와 관련된 것들-교회의 예배, 성례, 성직등-은 성스러운 것이며 여타의 인간의 삶-가정이나 직업생활 같은 것은 속된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원론 자체를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들의 생각에 남긴 결과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성스럽다’고 하면 어떤 느낌이 먼저 듭니까? 아무래도 종교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요? 집안 살림살이나 밥짓고 설거지하고 아이들 키우며 부부생활을 하는 일, 직장에 나가 일하고 사회 여러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들을 거룩하다거나 성스럽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개념입니다. 거룩하고 성스럽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는 모든 일에 해당됩니다.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하다고 여기는 교회활동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받지 못하고 오히려 온갖 인간의 탐욕과 야망으로 행해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한 것들이 속된 것입니다.

일상속에서 직장일을 열중하거나 집안일 설거지를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가정생활의 주되심을 믿고서 즐겁게 일하면 그것이 성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이 개념을 다시 새롭게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영역을 예를 들어서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합시다.

직업생활(학업을 포함해서)에서 예수를 주로 섬기기
‘설교라도 사단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있는 반면 털실로 웃옷을 짜는 일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가 될 수있다.’라는 말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Calvin Seerveld라는 분이 쓴 “Christian Workers, Unit!” 이라는 책의 글이 있습니다.

‘이분은 아버지가 생선장수였습니다. Great South Bay라는 곳에서…목요일 오후면 새로 들어오는 생선을 사러 잘 차려입은 귀부인이 가게에 왔습니다. 싱싱한 생선을 골라 추천하면서 웃음띈 얼굴로 물좋은 생선을 적절한 가격에 판매하는 정직하고 깨끗한 가게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아버지의 장사솜씨에 감탄하며 ’세상에 소명감을 잃지 않고 계시군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말합니다. 그 아주머니는 무심결에 진실을 말한 것이다. 아버지는 생선시장에서 종일 일하는 전임사역자로 선지자요 제사장이었다.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그것을 느낄수있었다. 생선을 사고 팔 때 느껴지는 웃음과 즐거움과 기쁨의 분위기가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암담하던 1930년 대공황기에 생선을 다듬어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파시면서도 불평이나 과거에 대한 미련없이 언제나 믿음가운데 주님앞에서 주게 봉헌하듯 생선을 자르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손과 지저분한 생선칼의 섬광위에도 임할수있음을 깨닫는다.’

또하나의 예를 봅시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 목사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분의 아버지도 정육점을 하시는 분이었다고 합니다.‘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제사장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암소와 돼지를 잡아 내장을 뽑고 고기를 자르셨다. 아버지는 늘 웆는 얼굴이었으며 손님들을 이름을 부르며 반기셨다. 아버지 밑에서 고기 자르는 일을 하는 분이 몇 있었는데 우리 식구들은 서로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불렀으며 진짜 가족과 같았다…어머니는 내가 어릴때 아버지의 앞치마와 같은 모양의 작은 작업용 앞치마를 만들어 주었고 해가 바뀔때마다 사이즈가 커졌는데 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실로의 성소에서 제사장 수업을 하는 사무엘에게 해마다 자라는 옷을 만들어 준 것을 기억했다..아버지는 우리 정육점의 제사장이었고 나는 그 일을 돕는 자였다. 우리 정육점은 축복의 장소였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일도 일 나름이지 내가 하는 일에서 예수를 주로 섬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상이 안간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식화 훈련이 필요합니다. 즉 세계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롬 12:2절, “너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우리의 사고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속의 이분법에 너무 젖어 있어서 이런 새 개념에 미숙합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피터슨 목사님이 말합니다. ‘우리는 일할 때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만유의 주시며 모든 일이 그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그 일을 할때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터슨 목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일을 왕업 (kingdom work) 이라고불렀습니다. 그것은 신자가 하는 모든 일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귀한 개념입니다. 왜? 우리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일이란 일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그 하나님을 나타내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시 8:5,6)

현대세계의 직업은 너무나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어서 그것이 인간에게, 이웃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와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모든 일은 어쨌든 이 세상이 유지되며 역사가 진행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일의 한 부분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모든 직업이 그럴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직종이라도 다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직종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수는 결코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약을 다루는 일, 매춘에 종사하는 것등 이런 것을 거부하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위 gray area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지요? 좀 수상쩍다고하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예를 들면 주식 중개인, 판잣집을 철거하는 구정의 집달리, 사형집행인, 정치가, 미국에 있는 이락 대사, 광고계에 종사하면서 성적인 연상 작용을 통해 상품을 팔아먹는 일, 국제적인 무기상(엄청난 리베이트를 주고 받는), 고리대금업, 부동산 투기꾼, 외국산 명품만을 고가에 파는 상인, 정경유착된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등 이런 일들은 어떨까요??

이런 직종은 비교적 쉽게 사람들을 돕고 유익을 끼친다고 여겨지는 직업들(의료인, 교사, 소방수, 엠불런스 기사, 저임금 노동자)에 비해 자신의 직업의 영역에서 예수를 주로 섬기고 있음을 확신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대해 생활영성의 대가 Paul Stevens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과감하게 말하자면 언제나 모든 면에서 이웃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없다.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대부분 언제나 담대하게 죄를 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담대하게 예수를 믿는 상태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은혜와 끊임없는 회개로 산다. 간혹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직종은 거의 없다. 루터에 따르면 고리대금업자와 매춘부, 수도사를 제외하고는 사실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 대한 다양한 형태의 전임사역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직업생활의 영역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분의 일을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실한 의식을 훈련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감사하고 지혜를 구하며 기쁨을 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편배달부든 구멍가게에서 일하든 기쁨으로 감당할수있을 것입니다.

가정에
성경에서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카톨릭의 제2 바티칸 공회에서도 가정을 ‘가정성소’라고 규정한바 있습니다. 흔히들 가정은 가장 작은 규모의 교회라고 합니다. 가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를 표상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입니다. 가정은 남자들이 여자의 내조나 받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교육시키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가정은 모든 구성원이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배우고 고백할 수 있는 훈련장이 되어야 합니다. 흔히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을 주된 표지로 삼지만 그것도 좋지만…더 중요한 것은 그 가정에 주님이 진정 주인이시라는 것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적 섬김입니다.
어떻게 가정에수 주의 주되심을 인정하겠습니까? 엡 6:4절에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받는 것이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병행해 나가야 합니다. 부모가 주의 양육을 받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자녀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자녀가 드러내는 모든 욕구와 불만과 의문과 소원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심을 부모가 깨닫기를 바라는 자녀들의 소리없는 기도다라고 한 폴 스티븐스의 말은 정말 묵상할 가치가 있는 말입니다.

당신은 부모로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정을 경험하며 양육받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할 때 그런 부모가 자녀를 인정함으로 그 자녀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싶은 깊은 욕구가 채워지겠습니까? 먼저 자녀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지 않고서 선행을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입니다. 자기 부모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때, 자신의 좌절감이 이해받지 못할 때, 아무리 잘해도 더 잘해야 하는 것처럼 느낄때, 소속보다는 행실이 더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때 자녀는 분노합니다.(엡 6:4) 자녀는 그 행실로서가 아니라 존재자체로서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이 행실보다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경험적 차원에서 깨달은 적이 없을때 자녀를 그렇게 키울 수 있을까요?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심을 배우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 뭔고하면 자식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럴때 자녀들은 부모 자신이 예수를 주로 믿고 있지 않음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헨리나웬 신부의 통찰을 빌리면 자녀는 집안의 작은 이방인이며 가장 귀한 손님이라고 했습니다. 의미있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다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여 자녀에 대해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때가 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부모가 훌륭하게 양육한 결과가 아닙니다. 불신자로 머문다해도 꼭 부모의 잘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인간이 어떻게 출발하느냐에 있지 않고 어떻게 끝맺는냐에 있습니다.

자녀들마나 차이가 있고 다양하며 쉬운 자녀도 있고 어려운 자녀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정의 열린 마음을 항상 그들에게 보여줌으로 부모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주권아래 있음을 무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실패나 실수, 세상적으로 볼때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태가 된다해도 그리스도가 주이신 한 그들의 삶에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꾸준히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부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 희생의 마음입니다. 엡 6:22절 이하의 부부의도리에 대한 말씀에서…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상호 희생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은, 에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항상 그분의 희생에서 자라나온 열매입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도 바람직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부부사이에 서로 희생할줄 아는 것입니다. 희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는 이성으로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부부는 그 그리움을 서로 채워줍니다. 그러면서도 그 그리움과 끌림은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려는 강력한 자장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사이좋은 배우자사이라도 인간의 본성속에 남겨두신 갈망은 남는 법입니다. 그러한 갈망의 이끌림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임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 그것이 어느 정도 채워질때는 그 만족감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영광스러음을 상상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은 경우, 또 독신의 경우와 같은 때도 우리들은 그 갈망을 통해 우리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열어 두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더 있겠지만 중요한 것만 추린다면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산다는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말은 쉽지만 매우 힘들고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것들이 잘 되지 않아서 이미 수많은 상처를 주고 받은 배우자, 부모자녀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늦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바른 개념을 잡아서 나가야 합니다.

적용
생활예배라는 것이 주중에 가정이나 직장에서 순서를 맞추어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읽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좋지만 어떤 의미에서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골 3:17절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교회의 예배 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영역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삶의 실제를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일 예배가 더 풍성하고 진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아주 원론적인 말씀만 드렸지만 자주 설교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통해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실제 성경통독과 QT를 통해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를 주로 인정하는 삶의 세부적인 것들을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QT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하겠지요. 앞으로 이러한 생활예배의 생생한 간증들이 많이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