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감각을 회복하라 02

By | August 1, 2020

넷째로 순종하게 됨입니다. 은혜를 알고 누리면 순종의 열망이 생깁니다. 순종의 가장 첫 번은 말씀을 듣고자 하고 그 말씀따라 살고자 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흔히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성경말씀에 열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주 보고 싶고 묵상이 즐겁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율법적으로,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기면 벌 받을까봐,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분을 닮고 싶어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율법의 외형적 순종은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형적인 율법준수를 원치 않습니다. 그 마음의 동기의 변화가 생겨서 율법의 총체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열망하게 될것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매우 분명한 증상입니다.

다섯째는 안식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안식하게 됩니다. 마음의 쉼이 있다는 것이지요.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심초사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챙기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편안합니다. 김이삭 선교사가 선교지에 나가기 전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가 많았지만 ‘너무 걱정이 안되서 걱정’이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매사에 노심초사하고 염려하고 불안해 하는 것은 은혜를 못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내가 집착하던 일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그 일을 계속 할지라도 말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옛날에는 내 교수직을 못하면 큰일 날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그냥 이 곳에 남아서 아무일 안하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은혜는 신앙생활에서의 성취의 강박에서도 자유케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려고 하는 집착은 점점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고 지치게 됩니다. 저도 자주 그런 우를 범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은혜가 필요한 설교준비를 더 잘해 보려고 애쓰다가 자주 지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때로 바쁘거나 피곤하거나 속상하는 일이 있으면 성경묵상이나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못하고 있으면 초조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정성이나 열심히 나의 영성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성도들에게 권해보는 것이 ‘영적 금식’입니다. 종교활동을 멈추게 해보는 것입니다. 그 상태로 며칠 몇주 지나면 내 속에 있는 믿음이 하늘로부터 내려진 것임을 서서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믿음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안식하는 마음은 은혜의 매우 중요한 증상입니다. 마 11:28절, 우리 교회 현관에 돋을 새김으로 붙은 성구를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은혜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안식이 없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은혜의 영역으로 들어올때 우리는 평온해지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안식이 없는 분들은 이 말씀을 잘 듣고 은혜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여섯째는 선한 동기와 용기가 부여됨입니다. ‘은혜 가운데 안식하게 되면 일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과 인도를 경험하리라’는 말을 자칫 잘못 듣고 ‘은혜 받으면 그럼 아무 일도 안해도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며칠전 어느 분으로부터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마음의 의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민수기 21장 14절 이하를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물을 주리라….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하나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십니다. 그들은 ‘안식 가운데’ 우물을 열심히 팝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과 인간의 책임의 결합이요 조화입니다. 

윌리암 제이가 말합니다. ‘기도와 근면, 의존과 활동은 성경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의 조잡함과 모순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인간의 수단을 무시하기 위한 구실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기 위한 동기이지 격려로 만들었다’고 훌륭하게 서술했습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 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면서 그분을 의탁하면 내면 속에서 조용히 어떤 일을 향한 동기와 더불어 하나님의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게 되면 지치지 않고 실패를 두려워 않게 되며 안식 가운데 일하게 됩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일을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나서지 말라고 하니 그럼 아무 일도 안해야 겠군요라고 대꾸합니다. 은혜의 선택으로 어떤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하십시오. 결단코 인간의 열심과 경쟁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섬기며 사랑하는 마음으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는 해도 좋고 안해도 좋습니다. 하면 즐겁고 안하면 편해서 좋습니다. 자기가 어떤 일에 소속되고 안되고 문제가 안됩니다. 해도 감사 안해도 감사한 상태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은혜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내가 은혜안에 거하면 타인에게도 은혜로 대하게 됩니다. 은혜를 누리면 타인의 죄나 허물이 그다지 크게 심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 대한 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은혜로 부자가 되어 있으면 그러한 결핍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잘해도 못해도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은혜가 없으면 다른 사람이 일을 잘목하는 것에 대해 견디지 못해 합니다.

은혜에 거하면 남을 흉보지 않습니다. 늘 좋은 말을 합니다. 은혜가 매마른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 속에서 속절없이 몰려다니며 쑥덕거릴때 그리스도의 교회에 엄청난 손상을 주는 독이 샘솟게 됩니다. 은혜의 사람은 다른 이를 은혜의 원리로 대하는데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칭찬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받을 만하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람을 사랑함으로 가치를 창조해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공동체는 서로가 은혜의 원리로, 은혜의 태도로 대할 때 아름답게 서 갈것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 자신이 은혜의 감각을 회복하십시오. 은혜는 이미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풍성하고 차고 넘치게 부어져 있습니다. 왕노릇이라고 표현할 만큼, 단지 그것을 받아 누리기 위해 무뎌지고 완악해진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자각하고 무릎을 꿇을 때 우리의 은혜의 감각은 회복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