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By | April 8, 2021

2/23/2020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 마가복음 성경공부 18과 같은 주제의 설교입니다.

16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막 1:16-20

세례요한이 헤롯안티파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신다. 요한복음에는 두 분의 사역이 중첩된 기간이 있는 것처럼 기록되었으나 공관복음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로 나타나 나사렛 예수께 바톤을 넘겨줌으로 새 언약의 시대를 열게 한 구약의 최중주자라는 점이다. 예수의 첫 선포는 ‘때가 찾다’ 이다. 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일을 이루려고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던 그 시간이 마침내 왔다는 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을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인간이 기록한 보편역사책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인류의 역사에서 이만큼 중요한 때는 없다. BC 와 AD를 가르는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이 순간은 아담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사단의 흑암의 나라에 예속된 이래, 길고 긴 역사 안에서 인간이 스스로 빚어낸 악의 모순성으로 말미암아 저주아래 놓이고 죄와 사망의 절망적인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음이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시대, 또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나 사상, 정치제도와 같은 것으로 고난과 결핍, 죄와 죽음을 결코 피할 수 없음이 명백해 진 시대를 말한다. 이 점은 마가복음 공부 초반에 여러 번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답고 위대한 창조 세계 안에 불법적으로 침입한 사탄의 나라가 죄와 죽음으로 인간을 다스리는, 마치 악의 공연장公演場처럼 된 세상에 당신의 아들을 왕으로 보내시면서 하나님이 이만큼 참아왔다. 하나님의 인내가 임계점臨界点에 도달하였다.

Enough is enough! 이제로부터 생명과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의 왕국을 되찾겠다라고 선포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은 ‘몸소 하나님’ 나라시다. Auto Basileia 라고 한다. 그분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한 왕의 임재에 대한 마땅한 반응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다. 악의 영에 사로잡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살던 삶에서 180도 돌이켜 진정한 왕이신 예수께 무릎을 꿇는 것이다. 옛 국적을 버리는 것을 회개하라고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믿음이라 한다. 그 일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의 순종을 드림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의 부르심 16절. 갈릴리 해변서 4명의 어부를 만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Come after me! 고 하시고 그들은 즉각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를 따라나선다. 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따라오라’는 그 당시에 익숙한 숙어. 스승이 도제를 부르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재능과 일을 고스란히 넘겨주겠다는 뜻. 구약에서 사람을 낚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뜻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렘 16:16,17절 겔 29:4-7, 암 4:2, 합 1:14

예수의 이 선포는 종말의 때에 어부로 오셔서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의에 매달려 사는 악한 인간을 심판하여 멸망케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도래到來를 말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낚시다. 예수는 종말론적 어부로 오셨고 그의 부르심을 따르는 자들을 종말론적인 어부로 만드신다. 이것은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에 국한 된 임무가 아니다. 모든 시대에 예수를 믿어 순종하는 자들은 모두 종말론적인 어부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일, 즉 심판과 구원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어부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즉각 순종하여 모든 것을 뒤에 두고 예수를 따랐다. 종말론적인 urgency와 radical obedience.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했고 승낙을 받았다. 그에 비해 이 네 어부는 가족과의 상의, 사업의 정리등의 시간을 갖고 않고 즉각 예수를 따라 나섰다고 마가가 기록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이것은 종말의 때가 심각성과 시급時急성과 함께 한 인생의 다른 어떤 필요와 요구도 이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의 자제들의 band가 형성된다.

사람을 찾는 하나님
이 네 어부가 예수를 만난 이 사건을 깊이 묵상하자. 양파껍질을 까고 또 까고 하듯 한 층 한층 깊이 들어가 보자. 15절과 연관시켜서 그렇게 해보자.

Q. 놀랍고 신비로운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찾고 계신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과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선한 행실은 인간이 참여하는 하나님의 행위다. 반대로 죄는 하나님이 혼자 계시도록 소외시키는 인간의 행위다. God in Search of Man. Abraham Joshua Heschel. 인간의 종교는 ‘아래에서 위로’ 신을 찾아가는 행위다. 그 노력은 가상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계시啓示revelation이 없이, 즉 ‘위에서 아래로’ 신이 찾아와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계시는 위에서 아래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행위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天國도 우리가 찾아 올라가는 곳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 내려 왔다. 천국으로 올라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우리에게 내려왔다. BC 와 AD 가 나뉘는 시대의 어느 날 갈릴리의 이 네 어부는 자기들을 찾아 내려오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나사렛 예수를 만나고 그와 함께 손잡고 걷고 먹고 마셨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자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일 1:1,2절

이제는 성령으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낼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히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 14:16, 26, 16:7절.

하나님을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영적으로 성장함에 있어서 나사렛 예수와 육체적으로 함께 하는 것보다 성령님을 모심으로 훨씬 더 유익함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성령예수안에 있다. 또 성령예수은 내 안에 있다. 내 위에, 앞에 뒤에 영원토록 계신다. 이러한 상태를 그림언어로 말한 말씀을 보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11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찾아오셨지만 하나님과 인간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너무나 엄청난 질적 차이를 갖고 있는 거룩한 분이기에 사람과 사람사이처럼 같이 살고 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안타깝다.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라는 말로 심히 축약을 하지만 그 내용을 우리는 만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아주 많은 방법으로 그것을 묘사하려고 애쓴다. 그중 하나. 하나님은 인간을 그릇으로 만드셨다. 물론 비유다. 무엇을 담는 그릇, container다. 무엇무엇의 담지자擔持者 라고 한다. 나는 질그릇이고 성령예수님은 보배다. 그리고 보배이신 성령님은 심히 큰 능력을 갖고 계신다고 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우리들의 정체성이다. 2,000년전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의 심방尋訪을 받은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도, 그 이후 2,000년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정체성正體性과 임무任務와 권세權勢
마가복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언젠가 나를 찾아오셨던 성령님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분은 내안에 영원히 계신다. 나라는 질그릇은 허접하고 가치없고 보암직 하지 못하고 깨어지고 낡아졌고 하찮아 보인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보배로 말미암아 나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 존재다. 질그릇이 깨어지면 속상하지만 그 사이로 보배의 빛이 새어나간다. 무엇보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처럼 우리는 몰랐고 기대하지 않았던 때에 성령님이 우리를 찾아 주셨다. 그리고 그를 따라오게 하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의 임무를 맡기셨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와 행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7,18

나의 존재와 말과 삶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증거한다. 어떤 사람은 믿을 것이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지 않았던 사람은 믿지 아니할것이요 정죄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말론적 어부로서, 하나님 나라의 agent로서 세상을 심판하는 다스림의 권세를 가진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ㅇ르 나타내려 함이니라 하시니라. 요 3:19-21

우리는 겸손하지만 단호하게 세상을 심판한다. 내 안에 있는 빛으로 인하여 이미 나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배와 그물을 뒤로하고 즉각 예수를 따라 나섰던 네 어부들처럼, 자신과 삶의 조건중 많은 중요한 것들보다 예수를 믿는 일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절망적인 죄인으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나,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음을 최상의 가치요 기쁨으로 여기고 사는 나의 모습들이 바로 빛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8절

사도 바울처럼 이러한 자각을 품고 사는 ‘나’라는 빛을 비추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사상 속에 배제되어 있는 자, 하나님을 부정하는 자, 능멸하는 자들 같은 이방인과,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것 같으나 사실상 자기의 自己義 Self-Righteousness 를 자랑하고 있는 율법주의자와 같은 어두움의 세력들이 힘을 잃고 두려워 숨게 되는 그러한 권세를 우리는 가진 것이다. 갈릴리의 네 어부들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에 정말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인생의 경험을 한 것이다. 세상을 찾아 내려온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세상이 지어지기 전부터 자신들을 위해 예정되었던 일이었던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