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연대성의 지경을 넓혀가면서 ‘세상이 악하고 다른 사람의 죄가 당신을 방해한다면 이럴 때 구원 의 한가지 방법은, 스스로 인간의 모든 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떠맡는 것이다. 친구들이여! 진리는 이런 것이다. 모든 죄와 모든 사람에 대해 진심으로 책임을 인정하면, 그것이 진실이고, 참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알게 된다…..인간은 그 어떤 것에도, 그 누구에게도 심판자가 될수없다는 것을 특히 유념하여라. 왜냐하면 심판자 스스로, 자신도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과 같은 죄인, 자신이야 말로 이 사람의 범죄에 대해 누구보다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내가 올바른 사람이라면 지금 내 앞의 죄인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대 앞에서 그대의 뜻대로 심판받게 될 죄인의 죄를 스스로 책임질수있다면 주저말고 실천하여, 그를 위해 고통을 받으며 죄인에게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말고 용서하라.’
도스토에브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중에 조시마 장로 사람이 제자인 알료샤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가르침이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성경책 옆에 나란히 둘 책으로 이 책을 꼽았고 진실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더불어 인간과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가장 위대한 소설로 꼽힌다. 설교자로 살아 온 나도 기독교신앙에 대해 이만큼 깊은 주석을 단 작품이 있을까싶을 정도로 그 내용을 자주 꺼내 묵상하곤한다.
요시마 장로가 한 이 말, 인간은 다른 모든 이들의 죄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도대체 말도 안되어 보일 수 있다. 누가 선뜻 동의 할 것인가? 조시마 장로는 모든 인간은 모든 사람들 앞에,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에 대해 죄인이며 전 인류적인 죄, 세계적인 죄, 개개인의 개인적인 모든 죄등 모든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고 바로 이 사실을 자각할때만 비로소 인류가 하나가 될수있다고 호소한다. 그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적인 무한한 우주적인 사랑안에 감동하게 될 것이고 개개인은 사랑으로써 온 세상을 얻게 될 것이다….그러니 어떤 사람이 죄인이면 그의 형제자매, 부모로서 나도 죄인인 것이다. 우리는 너, 나, 모두 이런 죄의 ‘연대 관계’속에 놓여 있으며, 라서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고통을 받고자 해야 함이 옳다. 러시아 정교의 전통안에 있던 이 사상, 어머니 대지에 뿌리를 둔 신앙은 같은 대지에서 숨쉬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지지 않아도 될’ 죄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짋어지는 이것은 그리스도의 자발적 고통에 대한 경의의 표방이요 모방의 욕구이다. 이 말을 듣고 즐거워할 사람이 있을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도 반발할 것이다. 너무 자기학대적 자성이 아닌가? 죄의 개별적 책임을 희석하는 두루뭉술한 이해가 아닌가? 등등. 그러나 우리가 인류의 연대성이라는 성경의 대주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면, 그 진리에 대해 ‘믿음이라는 순종’(믿어 순종케 하나니. 롬 1:5, 16:26)을 드리고자 한다면 깊이 숙고해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아니되더라고, 하나님의 광대한 진리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품고 그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며 나아간다면 어느 정도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첫 발걸음을 떼자면, 우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외 허물에 대해 정죄하고 비방하는 일을 멈추도록 하자. 그것이 아무리 거슬리고 화가 나더라도! John Sanford의 kingdom Within 에 나오는 내용, 타인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고 소름끼치는 죄와 허물은 바로 나 자신이 그에게 투영된 것일 수 있다, 나의 어두운 자아의 한 단면 일 수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여 보도록 하자. 백인들이 흑인을 그토록 증오하고 학대했던 것이 백인들의 내면에 있는 혐오스럽고 추해보이는 본성이 투사된것이라는 그의 분석이 마냥 틀린 것일까? 타인을 비방하지 말라, 타인의 눈의 티끌보다 자신의 눈의 대들보를 먼저 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원의는 무엇일까? 다음은, 우리는 누구도 타인의 죄에 대한 심판자로 부름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약 4:11, 12) 인간은 얼마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지!! 창세기 3장의 울림이 우리 영혼에 메아리 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