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제22일 – 다른 고난

By | April 7, 2025

1990년대 말, 제가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자그마한 예배당을 지어 준공을 앞두게 됩니다. 그런데 그 건물을 준공하는 절차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화장실 싱크대 아래에 있는 배수관을 모두 절연제로 감싸라는 것인데 장애인들이 휠체어로 싱크대 아래로 들어가면 뜨거운 배수관이 다리에 닿아서 화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저희는 침례교회라 강대상 뒤편에 침례탕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지상에서 대략 2미터 남짓 위라서 계단 몇 개면 충분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는 시행 명령이 내렸습니다. 장애자를 위해서. 그런데 저희 교회는 장애자가 없었고 비용도 2만불이라 포기했습니다.

미국은 장애자에 대한 배려가 매우 잘 되어 있습니다. 장애자들의 취업을 정부에서 알선하며 한번 고용한 장애인은 해고할 수가 없습니다. 장애인들을 이렇게 배려하는 관심과 그리고 또 큰 돈을 사회의 기부하는 등의 행위는 미국의 오랜 기독교 토양에서 자연스럽게 꽃핀 아름다운 모습들입니다. 부럽습니다. 우리나라도 최근에는 장애자 주차장에 함부로 주차하지 않는 등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장애자에 관한 학교나 시설들을 세우려하면 그 마을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항의를 하고 깽판을 칩니다. 소위 Not In My Back Yard (우리집 뒷뜰은 안돼!)라는 것이죠. 그것은 장애자들에 대한 깊은 경멸? 불편함이 마음 속에 뿌리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문제를 다루면서 지금까지 안 것은 ‘인간의 고난은 불가피한 것’이고 또 로마서 8장 말씀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함께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 이라고 말씀이었습니다. 욥기등과 같이 성경은 고난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한 성숙이라든지 가장 된 축복이라는 등의 것들은 경험을 통해서 붙여진 부차적인 해석이지 성경에는 명시적으로 그런 말이 없습니다.

고난은 으례 있는 것으로 하고 성경은 기록됩니다. 그리고 고난의 원인이라든가 목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그 고난을 인류의 연대성안에서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 만큼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적장애인이라든지 정신 지체 장애라든지 유전적인 병, 사고로 몸을 많이 다친 분들등, 여러 유형의 장애인들에게 미안함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가 나누어져야 하는 고난의 매우 큰 몫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그래서 그들에게 미안해하고 감사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경의를 표할 수 있을만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렇게 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우리에게 넌지시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시는 것들은 우리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어서 엄두가 나지 않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부정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심 안에서 마침내 당신이 설정하신 그곳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실 고집과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부인 동시에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만났다고 합시다. 바로 쳐다보고 좋은 기분을 느끼기는 힘들 것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아마도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담이고 뭔가 해야 될 것 같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장애를 장애자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몰고 그들에게 책임을 돌림으로 자신의 부담과 죄책감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해’ 라고 하고 욥기에서도 ‘인생은 고난을 위해서 왔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고 말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인간세상에 고난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피할 수 없이 어떤 형태로든 고난을 진다는 것이고 말씀에 의하면 자원하여 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에는 역사의 어떤 시점에 하나님이 우주적인 격변 가운데 세상에 임재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습니다. 그 때를 ‘여호와의 날’이라고 했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의 초림 같은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들은 그 날 이전의 상당한 기간을 그레이트 모멘텀 Great Momentum이라고 불렀습니다. 위대한 시대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민된 어떤 표지와 같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보증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장 3절에 ‘내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고난을 즐거워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자기가 지금 고난을 받고 있다면 그 자체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다 그래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질적인 악습은 신앙인이 고난을 겪는 것이 믿음이 부족해서 라든가, 기도가 부족해서 라든가, 죄를 지어서 라든가(이것은 부분적으로 그럴때가 있지만) 해서 교회안에서 자꾸 수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압박을 합니다. 저의 지인 한 부부는 결혼해서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았는데 교회내의 그런 핍박에 못이겨 결국 카톨릭교회 옮겼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로서 고난을 받는다(롬 8: ‘)면 그 고난 받음이 장차 볼 천국의 진정한 상속자임을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고난은 부정적이고 어둡고 슬픈 것이어서 우리 곁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서 이러한 새로운 통찰을 갖고 고난의 문제를 숙고하다보면 (여전히 싫지만) 어차피 피할 수가 없다면 그것을 안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영광을 자꾸만 되새김질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번 사순절에 그런 순종을 해 봅시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