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40대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여자분이 내 클리닉에 왔다. 몹시 지쳐보이시며 장례를 치르느라 탈진해서 수액 치료를 받고싶다고 보호자인 여동생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렇죠, 장례 치른다는게 정말 힘들죠.’라고 상투적으로 말하며 수액처방을 했다.
그런데 환자는 아주 무표정했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런데 사실은 아들이 죽었거든요.’ 이어지는 여동생의 말에 깜짝 놀랐다. 놀라고 안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처다보았으나 일체의 표정 변화도 없고 심지어 슬픈 표정조차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넋이 나가버린, 그저 몸만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울컥 올라오는 공감의 동정심을 억누를수없었지만 진심을 다해 말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얼마나 마음이 무너지셨겠어요’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처음 오피스에 들어왔을때와 전혀 다름이 없이 슬픔도 절망도 삼켜져 버린 무표정 그 자체였다. 나는 어떤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간후 나는 생각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절망이 있을까? 그건 슬픔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스러울 정도의 참척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담하고 혹독한 슬픔이라는 사전적 해석도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도대체 뭘하고 계시기에 인간으로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시나? 나의 고질적인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 고개를 쳐들었다. 당연히 성경에 그 답이 적혀있지 않은 해묵은 저항! 아마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항상 있어왔을 그런 일!
19세기 후반 중국 내지 선교사 였던 허드슨 테일러가 첫딸 그레이슬 뇌막염으로 잃고 난 뒤의 일기: ‘…,이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말할수있을까? 어여쁜 그 모습 아침마자 환한 웃음을 띄고 달려와 안기던 그레이스는 더 이상 곁에 없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가? 정원사께서 오셔서 장미를 꺾으셨으니.
내가 본 그 환자가 만일 신심깊은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나같으면 못할것같다. 아마 내가 봤던 그 분 같이 모든 감정이 소멸된 사람으로 그냥 숨만 붙어있는 참척의 아비로 굳어져 있을 것이다.
하나님, 당신께 그런 책임이 있는지 알순 없지만 이 어머니에게 당신이 해 주실수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이시니 무언가 인간이 헤아릴수없는 그 무엇으로 그녀를 회복시키시겠지요?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가 무궁하신 아버지, 사순절 기간동안 자신의 또 동료인간의 이러한 고통을 보듬으시고 위로하시는 은총을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저희가 알 수도 없고 가늠할 수도 없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우르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