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세번째 주일 (작은 부활절)

By | April 20, 2025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옵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고전 15:35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할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라는 의문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번 사순절을 지내면서 이런 이슈를 숙고함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이 주제에 대해 엘리스터 맥그라스의 책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원하는가?’ 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찾을수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용한 씨앗의 이미지는 이 땅의 몸과 천국의 몸 사이에 유기적인 연관이 있음을 확실히 암시한다 이 땅에서의 몸과 천국에서의 몸이 근본적으로 다르면서도, 정체성에서는 연속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생겼을지 걱정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언젠가는 살아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활한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초기 기독교의 제자들은 천국 시민은 에덴동산의 상황을 재현하듯 벌거벗은 상태일 것이라고 했다. 벌거벗어도 수치심이나 성적 욕망이 생기지 않고, 인류의 자연스럽고 순수한 상태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의문은 죽을 때 몸의 장애가 생긴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전신지체장애자는 여전히 그런 몸으로 부활하는가? 어떤 사람은 전쟁에서 끔찍한 상처를 입고 죽을 수 있다. 혹은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잃은 경우는 어떨까? 질병이나 상처 때문에 몸의 변형이 온 경우는 어떨까?

여기에 대해서 올림푸스의 메튜어디스라는 학자는 부활할 때 인간의 구성요소가 재배열된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금이나 기타 물질로 고귀한 형상을 만든 뛰어난 세공기술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아름다운 형상이 누구의 질투로 인해서 손상이 가해졌다,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 기술자는 한 가지 방법으로 이것을 회복한다. 즉 그 고귀한 형상을 녹여서 ‘다시 조형’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주장은 12세기의 신학자 피터 롬바르드의 책에서 볼 수 있다. 부활한 몸은 모든 결함이 제거된 상태의 인류로 ‘재구성’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종종 거론되는 기독교 신자의 화장 문제에 대해서 빌리 그라함 목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몸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화장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매장에도 화장과 같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 선조들이 무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매장해도 몸이 분해되는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부활에 관한 몸이나 무덤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몸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완전히 변화되고 영광스럽게 된 몸일 것이다. 다시는 연약함이나 질병이나 고통이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영원하고 영적인 모습일 것이다.

한 가지 더 조금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해 본다면 만일 90세에 죽으면 천국에서도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혹은 다섯살에 죽으면 어린 나이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중세의 신학적 논쟁이었다. 13세기 말에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하게 되는데 사람은 보통 서른 살 무렵에 자신의 최고의 모습에 도달하기 때문에 비록 그 나이까지 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시기의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했다.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보나벤추라는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당시의 신체적 상태가 우리가 부활했을 때의 몸의 규범이라고 주장했다. 완벽한 은혜로 우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부합된다. 그분은 나이와 신체와 외모가 모두 완벽하다. 부활을 통해 모든 신체적 흠과 결함은 치료되거나 제거될 것이다. 유년기에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나이에 맞게 부활할 것이다. 비록 똑같은 신체 크기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늙고 앙상한 사람은 자신이 그 나이에 였을 때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거인과 난쟁이는 적당한 크기를 부여받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완벽하게, 완벽한 인류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부활할 것이다. 이러한 추측들이 흥미롭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쓸모없다고 말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이라는 다소 애매하고 모호한 주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숙고하고 좀 더 실체적으로 느껴지도록 노력하는 일은 분명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의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 즉시경험할 육체적 부활에 대해서 좀 더 확신을 가지고, 좀 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 필요가 있다. 다음 세상에서의 삶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현세의 삶을 가장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맥그라스의 신학은 쉽고 포괄적이며 현실적이다. 생물학 박사로 신학박사가 된 그의 글은 지나치게 사유적이지 않고 실증적인 장점이 있다.

기성 신학에서 이런 글을 찾아보기 힘든다. 이번 사순절 부활주일에 육체적 부활의 모습을 즐겁게 상상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