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부활절 주일을 향해 나아가는 기간에 6번의 주일을 맞는데 그것은 작은 부활절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순절의 매 주간은 사순절 전체의 축소판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우리는 이 작은 부활절 주일에 ‘부활에 대한 진리’를 조금씩 이해하고 묵상하여 마지막에 그 퍼즐조각들이 맞추어 져서 부활의 그림을 그려봅시다.
예수님은 영원이라는 시공속에 계시는 분으로, BC와 AD를 나뉘는 시점에 이 역사의 시공속으로 들어오시고, 삼십년 남짓한 생애를 끝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영원의 시공속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실때 지친 자, 타락한자, 병든 자, 가난하고 무시당하는 자, 혼란에 빠진 자와 죽은 자를 만나주셨습니다. 그 만남의 능력은 그 사람을 크게 변화 시키기에 충분 했습니다. 수가 성의 목마른 여인, 여리고 성의 세리 삭개오, 나병환자, 눈 먼 바디메오…참으로 많은 이들이 주님과의 만남으로 큰 삶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은 고작 삼년 여, 지역도 경상남북도 크기 보다 작은 팔레스틴 땅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에서 부활하여 높임받으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완전히 초월하여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며칠전 당신을 배반하고 낙망한채 어부의 길로 돌아간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면목없는 제자를 해변의 식탁으로 초대하시어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의심하던 도마의 믿음에 실체를 주셨고 낙망한채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에게 말씀을 풀어주사 심령을 뜨겁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500여 형제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주셨고 교회를 핍박하러 다마스크스로 가던 사울을 만나주셨습니다. 사울은 압도적인 하나님의 영광앞에 시력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바울로 이름을 바꾼 사울이 터키에서 유럽으로 갈지 망설일때도 만나주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은 아브라함도 만나주셨고 모세에게도 그리하셨습니다. 동서고금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그의 삶이 쇄신된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런 분들 처럼 우리도 만나주실까요? 그런 믿음의 ‘큰 어른’들에게는 그리하셔도 믿음의 졸부, 밤낮 믿음이 흔들리고 무기력한 우리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히 13:8) 우리의 죽음 이후 누릴 육체의 부활의 삶 이전에, 아직 이 첫 창조세계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예수부활의 은혜는 이러한 것입니다. 2,000여년 전, 팔레스틴 땅에 계시며 뭇사람을 만낮주셨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시간공간의 아무 장애가 없이 지금 여기서 here and now, 내가 지치고 힘들때, 병약하고 두려울때, 혼란속에, 멸시와 적대감속에 있을때, 지은 죄로 인해 낯을 들지 못하는 자들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지배세력인 이 세상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도우심, 동행해 주심, 말씀해 주심…위로 격려 동정이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2025년 사순절에 저는….부활하사 영광스런 몸을 입으셨으나 제자들이 알아뵐수있었던 우리 주님의 그 자비로운 눈길, 부드러운 터치, 위로와 격려의 음성을 듣기를 갈망하며 갈망합니다. 바라고 믿고 소원합니다.
‘부활하신 나의 예수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폐결핵이 심해 피곤에 지치고 각혈을 하면서도 인디언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할때, 그가 생명의 최저선에 이르렀을때, 메사츄세츠의 숲속에서 만나주신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뵈진 못해도 이 세상것이 아닌 신비한 빛, 죄인의 무릎의 힘이 빠져 그 발 앞에 부복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임재의 누미노제(임재의 위엄과 두려움)를 불초 이 종도 경험하게 해 주소서. 시몬느 베이유가 텅빈 성당에 앉아 하나님에 대한 사색을 하던 중 ‘그 순간 그분이 나를 소유하셨다’고 고백한것 같은 만남, 부활하신 나의 주님을 만나는 은총을 삼가 베풀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