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제7일 – 우리의 불행

By | March 31, 2025

2025.3.12 사순절 제 7일

창세기 3:7, 10 에 하나님께서 반역한 뱀에게 저주를 내리시고 아담의 타락으로 땅도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타인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목적으로 초월자에게 비는 것이 저주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인류는 전 역사에 걸쳐 하나님의 선하심과 복을 스스로 차버린 댓가를 겪게 되었는데 그것은 죽음을 포함해서 인간의 모든 종류의 불행이며 그것을 저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저주는 죄의 결과이며 악이라 불러도 되고 죽음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갈라디아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짐을 지신것을 저주를 대신 지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갈 3:13 하는 말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셨다는 말은 우리의 불순종으로 자초한 모든 불행들을 대신 지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적지않게 들었고 낯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하고 그분의 백성된 우리 신자들에게 더 이상 저주로 분류할수밖에 없는 고난과 고통이 있다는 점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합시다. 신자의 삶에도 크고 작은 불행이 많습니다. 그것을 위장된 축복이라느니 성숙을 위한 과정이니 하는것은 모든 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당신의 백성, 자녀들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만약 죽을 때 까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질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금 여기만이 내 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절대로! 이 사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위대한 반증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길이와는 도무지 비교불가하게 길고 영원한, 그리고 질적으로도 하나님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의 증거 입니다.

세상은 인류 스스로 자초한 저주에 신음하며 살았고 그리스도인들도 거기서 온전히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유물론자와 크게 다르지 않게 내세에 대한 믿음이 빈약합니다. 그저 막연한 위로, 애매한 약속 도무지 손에 닿지 않는 신기루마냥 여기고 있지는 않나요? 생물적 존재이기에 생각조차 하기 끔찍한 죽음이라는 신비의 장막뒤에 있는 것이라 지금 여기의 here and now 삶에 아주 희미하고 애매한 영향 밖에 못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라는 형언할수없는 무게의 저주를 져 없애셨다면, 그래서 지금 아직 그 일부(혹은 전부)가 나를 고톰스럽게 하고 있다면 그건 무슨 뜻일까요? 사실은 머지 않아 ‘반드시’ 들어갈(이미 들어와 있으나 보이지 않을 따름인) 그 나라가 내 앞에 놓여 있음을 강력히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큰 소리로 부르시고 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사순절을 지나며 영원히 벗을수없었던 저주를 이미 already 벗겨주셨고 다만 아직은 not yet 완전한 성취를 기다려야하는 우리에게 거듭거듭 나누어야 할 진리일 것입니다.

소망의 주님! 남은 저주를 타인들을 위해 지고 사는 저희들에게 새로운 삶 brand new life를 확고하게 믿고 주장할수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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