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봇 신학대학원에 Neil Anderson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이 퇴근해서 보니 키우던 고양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머리가 쎄게 부딪혀 뇌진탕으로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낮에 집안에는 아들 밖에 없었고 그렇게 할 만한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고양이를 던졌니?’ ‘ 아니요. 안던졌어요’ ‘네가 고양이를 던진것 같은데~’ ‘정말 안 그랬어요’ ‘너 거짓말하면 안 된다. 고양이를 던졌지?’ ‘안던졌어요’ 교수님은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매질을 하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고양이를 던졌지?’ ‘안 던졌다니까요’ 찰싹찰싹 ‘엉엉, 안 던졌어요’
그러자 교수님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안 던졌다니 참 다행이구나. 나는 누가 던졌더라도 다 용서해 줄 참이었는데…그래 이제 우리 고양이 장례식이나 치러 주자꾸나. 그러면서 마당에 한 구석에 냥이를 파묻고 그 위에 자그마한 십자가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네가 고양이를 위해서 기도하렴’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나님, 다시는 고양이를 던지지 않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무조건 다 용서했을거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고백을 한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처벌이 두려워 죄와 죄책감을 무의식의 영역에 밀어넣거나 자신의 선행과 상쇄시켜 자신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그리스도인이니까 성경에서 설교에서 그렇게 말하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일대일로, 진지하게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말해주면 매우 불쾌해 합니다. 교리적으로는 죄인이나 실존적으로는 죄인이 아닌 셈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정직하고 진솔하게 말할수있는 것은 복음을 바로 알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의 본질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용서의 증표 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깨달은 자 만이 하나님께 죄를 곧이곧대로 자백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시리니..요일 1:8
여기서 자백 confession이란 ‘하나님과 더불어 말하다’ 입니다. 나의 죄에 대해 하나님이 보여주고 지적하시는대로 미주알 고주알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용서 되었으므로….안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서 볼수있는것은 십자가가 너무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깨닫고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는 우리의 죄가 태산같아도 다 덮을 권능이 있고 아무리 추해도 눈과 같이 희게할 능력이 있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 ash로 십자가를 그리는 것은 가슴아픈 참회와 죄에 대한 용서의 승리가 동시에 드러난 것입니다.
오, 십자가에 달리사 나의 죄를 담당하신 구주 예수님, 주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용서를 믿고
하나님 앞에 저의 모든 죄의 뿌리까지 자백하도록 도와주십시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