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엡 1:9
성경에는 ‘비밀’ 이라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특히 엡 3:3~6 등에 반복나오는 이 말은 아무도 모르게 꽁꼼 숨겨진 것 secret이 아니고 ‘신비’에 가깝습니다. 미스테리
mystery, 헬라어로는 무스테리온 이라는 이것은 비밀스러운 사실이긴 한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에게는 보여지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일 이라는 뜻 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은 신비 그 자체 입니다. 보이지 않은 그 분의 실재, 하나님되신 모든 것들, 천지창조,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 하나님의 기적들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매우 중요한 것은 창조의 가장 탁월한 존재인 인간의 타라과 그 인간을 구원하시는, 천지창조보다 먼저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작정된 구원 역사의 모든것들은 그야말로 신비중의 신비 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역사의 길고긴 길목에서 당신이 선택하신 자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시는데 복음전도자의 전도, 교회의 가르침, 경건서적 독서 등을 통해서 입니다.
이것은 신적인 세계를 알고 들어가는 것이며 몸은 비록 여기 사나 장차 누릴 새로운 세계의 약속과 보증을 이미 받는 것이서 한 인간이 살면서 받을수있는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선물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반갑지 않지만 엄연히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것이 고난의 신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통은 종교의 세계나 그 밖을 막론하고 인간의 탐욕과 죄의 결과라는 시사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고난을 겪을때 (자신의 명료한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 때문에….라는 이야기는 너무 무정하고 수용하기 힘듭니다. 나는 인간의 고난 그 자체가 신비이며 그 메카니즘도 의미도 결말도 알수없는, 아마도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얼추 15~20년 전부터 인간고난에 대해 묵상해 오면서 한 때는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라는 내용의 설교도 더러 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유지하고 있지만 ‘인간이 고난을 지는 것은 인간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져야할 고난의 한 몫을 지는 것이며 특별히 장애자와 같은 분들은 그중 큰 몫을 지는 것이므로 우리가 경의를 품을수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한다 해도 내가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난중에 있다면 그것이 위로가 될까요? 종교영역 안팎 공히 에서 고난은 인간을 연단하여 훨씬 훌륭한 사람, 성숙한 인간이 되게한다는 좋은 이야기들은 셀수없이 많은 예화와 더불어 쎄고쎘습니다. 그러나 한번 들어보세요. 헤롤드 퀴쉬너 라는 20세기의 랍비는 아들이 조로병progeria라는 병으로 일찍 죽었습니다. 한 살에 10년을 늙는 이 병으로 십대초기의 아들을 잃은 그는 ‘남들은 내가 이 일을 통하여 훨씬 원숙한 랍비가 됬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은 내 아들이 살아 돌아온다면 그 원숙함을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더구나 고난은 불평등합니다. 내가 원인제공하고 말고에 무관하며 반드시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인간이 보기엔 무작위적 입니다. 인간은 그래서 불평등을 인간사회의 제도적 악으로 인지하고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폭력도 정당화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바라신다고도 합니다.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불공평은 으례 있는 것으로 하고 말씀이 전개됩니다. 고난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적 약자’라는 말은 그 자체로 폭력적인 표현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약자들 중에는 폭력적 방법을 통해서라도 공평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치 많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다. 왜 돈 없고 힘없다고 ‘약자’ 인가요?
‘사랑하는 형제들 들으십시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나라의 상속자로 삼지 않으셨습니까?’ ‘약 2:5
장발장이 임종의 침상에서 사랑하는 딸 꼬제트에게 말합니다. ‘꼬제트, 네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줄 때가 되었구나. 네 어머니의 이름은 빵뛴느 였다. 빵뛴느!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너는 무릎을 꿇어라. 네 어머니는 정말 힘들고 가엽게 살았다. 그녀는 네가 행복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것을 불행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몫이란다…’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몫! 어떤 기준과 원칙과 절차가 있는가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 몫이 적어 고통이라면 그것도 고난의 신비에 속할뿐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나 그 공평하심이 역사의 이 편에서
수긍되는 일이던가요? 그것은….,,끊어져 있으나 사실은 굳세게 연결되어 있는, 영원이라는 분리될수없는 시공안에서 ‘조만간’
겪게 될 ‘내일’에서 비로소 통쾌하게 경험하게 될 공평함이 아닐까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사순절을 보내며 고난의 신비를 한거풀 더 벗겨 볼 수 있게 하시고 그래도 알 수 없는 한계앞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경이로움으로 느끼게 하소서. 아멘